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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실레는 클림트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젊은 화가에게 친절하게 멘토 역할을 해주었다. 클림트는 젊은 실레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져서, 그림을 사주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기도 하고, 모델을 주선해주기도 하였으며, 후원을 해줄만한 사람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1911년, 실레는 17세인 Walburga (Wally) Neuzil을 만나서 비엔나에서 같이 살게되며, 그녀는 그의 가장 놀라운 작품 중 몇 개의 모델도 하게 된다. 그녀는 이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모델이었으며, 그의 연인 중 한 명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실레와 Wally는 폐쇄공포적이라고 느낀 비엔나의 환경을 탈출하기를 원하여, 남부 보헤미아에 있는 작은 도시 Krumau로 간다. Krumau는 실레의 어머니의 출생지이며, 현재 실레 기념 박물관이 있다. Kramau에 연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활양식, 특히 마을의 십대 소녀들을 억지로 모델로 고용한 것을 몹시 좋지 않게 생각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거의 1년 동안 징병을 피하고 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실레의 생활과 작업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결혼 3일 후, 실레는 군 복무를 명령받았고, 프라하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실레는 동료들과 함께 전시장에서 살았으며, Edith는 그와 함께 가서 호텔에서 머물렀다. 실레의 상관은 그들이 가끔 만나는 것을 허용하였다. 군복무 중임에도 불구하고 실레는 베를린에서 전시를 했으며, 같은 해에 취리히, 프라하, 드레스덴 등에서 성공적인 전시를 하였다. 그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러시아 포로들을 호송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약하고, 뛰어난 글씨 때문에 Muehling이라는 마을 주변에 있는 전쟁포로수용소에서 서기로 일하게 되었다. 포로 러시아 장교와 그의 상관인 Karl Moser를 그렸는데, 이 상관은 사용하지 않는 상점을 스튜디오로 사용하도록 주기도 하였다. 실레는 수용소의 음식 상점을 맡아 있어서, 그들 부부는 배급보다 나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1917년 비엔나로 돌아와 다시 작품 활동에 집중하게 되었다. 많은 작품을 내었으며, 작품들은 그의 재능을 원숙하게 잘 나타내었다. 그는 1918년 비엔나에서 열린 분리주의 49회 전시회에 초대되었다. 실레의 작품 50개가 선정되어서 중앙 홀에 전시되었다. 또한 전시회의 포스터를 디자인 하는데, 최후의 만찬을 흉내낸 것으로 예수의 자리에 자신의 초상을 넣었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으며, 그 결과 실레의 그림의 가격은 높아졌고, 많은 초상화 주문을 받게 되었다.
1918년 가을 유럽에서 2천만명의 환자를 발생시킨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에 도달하였다. 임신 6개월인 Edith는 이 때문에 10월 28일 사망하며, 실레도 3일 후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이 사흘동안 그는 Edith의 스케치 몇 점을 그리는데, 이것들이 그의 마지막 작품들이다.
1912년 투옥된 후에는 죽음과 부활 같은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물론 여성의 누드가 여전히 주된 주제이기는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그의 그림은 더 커지고 세밀해졌다. 하지만 군복무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잘 없어서, 대부분의 작품은 경치나 군 장교 같은 사람들을 간단하게 그리는 정도였다. 이 기간동안 그는 모성과 가족의 주제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인 Edith는 이 시기 여성을 그린 대부분의 작품의 모델있지만, 전쟁 동안의 여건 때문에 많은 작품의 모델들은 남성이었다. 1915년까지 실레의 여성 누드화는 더 풍부해지기는 했지만, 많은 것들이 마치 생명이 없는 인형 같은 형태로 그려졌다. 그 후 그는 자연적이고 건축적인 주제들을 많이 그렸다. 마지막 몇 개의 작품은 자위행위를 하는 포즈의 여성 누드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