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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한국영화의 대작은 바로 "노량 : 죽음의 바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간적으로는 3부작 중 두 번째로 개봉했던 한산이 가장 앞서 한산(2022) → 명량(2014) → 노량(2023) 순서입니다.
왜 1598년 11월 18일 매서운 겨울, 노량해전 전사
흔히 마지막 전투는 적들이 퇴각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뒤쫓지 않는 것이 통상의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마음가짐이 달랐던 대목이 있습니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卽無憾).”
여기서 이순신 장군의 결의를 알 수 있습니다. 총사령관이 조총이나 총탄과의 충분히 안전한 거리에 있지 않고 지휘선이 계속 적의 사정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무릅쓰고 전투를 지휘했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굳이 마지막 전투에서 살아남아도 선조의 미움을 받을 것이다!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노량해전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는게...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순간 장렬히 전사한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전투에서 왜군을 섬멸한다면,
앞으로 한 동안은 감히 다시 조선땅을 밟을 엄두를 못 낼 것이다!는 예측을 한 게 아닌가 합니다.
영화 명량, 한산 이후 마지막 이순신 장군의 전투인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엄청난 팬 김한민 감독이 10년의 세월을 바쳐 만든 작품입니다.
시사회를 다녀오고 난 일부 지인에 따르면, 컴퓨터 그래픽에 거의 몰빵하다시피 엄청난 해전 영화답게 보는 내내 즐거웠다는 평을 하고 있습니다. 전투신이 이 정도까지? 싶을 정도였다고 하는군요.
노량대첩, 세계사적으로도 엄청난 규모의 해전으로 불립니다.
이 처절했던 해전은 조선 수군은 4척 침몰에 전사자 300여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해냈던 해전 중에서도 피해가 제법 컸습니다. 명나라와의 연합군이었죠.
하지만 일본의 피해는 더욱 심각해 200여 척이 침몰되었습니다. 100여척은 나포되었습니다. 통상 배 한 척에 100여명 가까운 병사들이 타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최대 2만 여명이 살아서 일본 땅을 밟지 못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한 전투에서 2만여 명이 전사한다는 것은 괴멸 수준입니다.
노량해전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드리자면,
1598년 음력 11월 18~19일 사이에 일어난 해전입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598년 12월 16일 아침에 일어난 해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양력을 기준으로 하니 정확히 425년 전 일이네요.
지금 날씨로 따지면 아침 바다는 얼마나 추웠을까요? 지금도 군인들은 늘 춥습니다. 거위털 파카를 입어도 추운 날씨가 혹독한 겨울 날씨입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철수작전을 서두르게 됩니다.
정유재란(1597년) 후에 조선에 주둔하던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진린과 이순신 장군이 1598년 9월에 노량 근해로 이동하게 됩니다. 왜군이 순천 지역에 모여서 이동을 할 것이라는 첩보 때문이었습니다.
수륙양용작전에 포위되었던 왜군 장수 고니시(小西行長)는 위협을 느끼고 진린에게 퇴로를 열어달라고 간청합니다.
통상 적장이어도 이런 호소를 들어주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진린은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고니시 통신선 한 척이 포위망을 나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대신 이순신 장군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고 합니다.
통신선의 역할은 다른 왜군 부대와의 연락을 통해 뭉쳐서 다시 이순신 진형을 공격하면서 탈출로를 여는 것이었고, 이순신 장군은 진린 장군을 꾸짖은 후 대형을 갖추게 됩니다.
11월 18일 밤 이순신 장군의 예측대로 왜군의 배 500여척이 노량에 집결합니다.
19일 새벽, 지독한 싸움이 끝나갈 무렵 다시 그날 오전까지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觀音浦)로 도망가는 마지막 왜군 부대를 추격합니다.
이때 총탄이 이순신 장군의 가슴에 맞습니다.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유언이라는 평가를 받는 실제 이순신 장군의 유언입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세 영화를 국뽕 시리즈라고 합니다. 영화를 통해 당시의 애국심을 일깨워주고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의 조상들이 이렇게 헌신했다는 사실은 후대에게 큰 자부심입니다. 과연 국뽕 시리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서양에서도 가장 완벽한 장수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위키피디아에 나온 이순신 장군의 기록만 해도 영문으로 수십 페이지에 달합니다.
그 동안 " 명량’의 이순신을 연기했던 최민식 배우, ‘한산’의 이순신을 연기한 박해일 배우에 이어, ‘노량’에서는 이 둘의 스타일을 모두 갖춘 김윤석 배우 이렇게 세 명이서 탄생시킨 현대의 이순신 장군.
김윤석 배우의 촬영당시 나이가 55세였고, 이순신 장군이 54세에 순국했으니 설정 자체도 거의 비슷한 치밀함이 돋보입니다.
관록의 백윤식, 정재영, 허준호 처럼 연기파 배우들의 열정이 한데 합쳐 세계사적인 해전에 빛나는 모습을 멋지게 재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특히 해전 장면만 무려 100분 간 쏟아지는 파도와 웅장한 사운드, 그리고 감동적인 장면들은 우리나라 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마침표가 될 것 같습니다.
마무리 하기전에, 역사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과거 이순신 장군은 모함으로 인해 선조로부터 사실상 죽게된 상황에 놓였습니다.
당시 선조의 성격을 아는 신하들은 그 누구도 구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죠. 이때 72세의 정탁이 상소문을 올렸고 그는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서도 그 유명한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 상소문을 선조에게 바쳤습니다.
이 상소 이후 류성룡과 이원익 등이 이순신의 처벌에 반대하고 나섭니다. 정탁은 거의 모든 판서와 재상을 지낸 정말 보기드문 관료였는데 생각보다 덜 알려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이순신을 살렸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선조는 뜻밖에 당황하면서 이순신을 백의 종군으로 풀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모질게 고문 후유증의 몸을 이끌고 당시 13척의 배로 133척을 격파하는 세계적인 명량대첩으로 나라를 구하게 됩니다.
이 정탁의 호는 약포 입니다. 그의 구명으로 충무공의 후손들은 약포 정탁의 제사를 늘 지냈다고 합니다. 약포 할배, 약포 할아버지의 제사에 충무공의 후손들이 와서 감사함을 전했다 하죠.
어쩌면 이 약포 할아버지가 반쪽의 이순신을 진정한 이순신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약포 할배는 과거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패배한 뒤 참수형을 당할 처지에 놓인 것을 또 구명한적이 있습니다. 이 두사충은 적극적인 구명탓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다시 1597년 정유재란때 조선에 와서 참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도와 노량해전에 출정해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훗날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하여 지금의 대구 광역시에 정착해서 뽕나무 등을 심고 완전한 한국인으로 살아갑니다. 약포 정탁이라는 인물은 사람을 살리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나 봅니다.
의병장 김덕령 장군도 구명을 했었는데, 안타깝게 김덕령 장군은 역모로 몰려 옥사를 했습니다. 당시에 그 누구도 김덕령 장군을 구명하려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구한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조선이라는 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했다고 볼 수 있겠죠. 정탁 할아버지의 초상화 자체에서 인자함이 물씬 풍기는 듯 합니다.
우리에겐 아찔한 순간일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참으로 아름다운 스토리 입니다.
영화 노량을 보면서 정탁 할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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